이번에 겸사겸사 3d 모델링으로 판옥선과 거북선을 만들어 볼까...
여기 저기에서 자료를 모으고 있는 중입니다.....
어렵네요....ㅠㅠ
그래도 혹시 필요 하신분이 계실까봐..
공유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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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조선시대 군선이라고 하면 거북선을 이야기한다. 한강에도 모형이 하나 있고 무수한 책에도 나온 거북선의 이름을 모르는 한국인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조선의 주력 전함은 거북선이 아닌 판옥선이었다. 물론 거북선은 판옥선을 개조한 전투함이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조선시대 군선=거북선의 도식을 그려내는 것은 잘못이다. 원래 조선 초기의 군선은 맹선(猛船)이었는데 삼포왜란후 재래식 군선인 맹선으로는 종래와는 달리 화기로 무장한 왜구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새롭게 만든 전선이었다. 판옥선은 거북선이 그랬던 것처럼 임진왜란 직전인 명종 10년 처음 나타난다.
개발경위
여말선초 극성을 부리던 왜구가 대마도를 정벌한 세종이후 한동안 잠잠하였는데 중종 5년 삼포왜란을 일으키는 등 다시 창궐하기 시작한다. 이 난은 그동안 조선의 막강한 수군 세력에 잠잠하던 왜가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하는 계기가 되는데, 본래부터 조운을 겸하도록 제작된 맹선등의 구식 조선 전함들이 쓸모가 없어진 것도 이때 이다. 즉 왜가 점차 중국의 해적들과 접촉하여 화포로 무장하고 당시 조선 최대 전함인 대맹선 만한 배 까지 동원하는등 점차현대화 되는 왜를 당해내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맹선이 본래부터 평화시의 세곡을 운반하는 조운선을 겸하도록 만들어진 때문이기도 하였다. 이에 하는 수 없이 조선은 맹선은 그대로 버려두고 한동안 소형 경쾌선으로 왜를 대적하려 했으나 왜가 보다 개량된 화기와 큰배로 침입함에 따라 당할 수 없게 되었다.
이때 서후는 중종 16년 "지금 수군에서는 소선(小船)만 쓰고 있지만 소선은 아무리 민첩 하더라도 접전에서는 쓸모가 없고, 적이 칼을 빼어 들고 뛰어 들 수 없는 고준(高峻)한 대함을 가지고 적을 내려다 보며 제압해야 합니다"라는 진언을 했다. 또한 중종 39년에도 같은뜻의 상소가 판중추부사 송흠에 의해 올려졌다. 명종 10년 판옥선을 처음 시험하게되었고 이후 판옥선은 우리나라의 주력함으로 활약하게 되었다.
사진:조선후기(1741~1800경) 수군편제를 그린 병풍중 통제사의 기함 부분. 배 이름이 천자 1호 좌선이다.(한국의배, (이원식, 대원사))
구조
다음 그림은 당시의 설계도면 이라고 할 각선도본(各船圖本)에 나온 전선도이다.(김재근 저 우리배의 역사(1989, 서울대 출판부)). 당시 조선공은 이 그림을 보며 비례, 구고현법, 전통 조선기법을 응용하여 전함을 만들었다. 우선 도본에 나온 원문과 이를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戰船
本板長九十尺廣十八尺四寸元高十一尺三寸下層信防牌高五尺船頭廣十五尺
船尾廣十二尺七寸上粧長一百五尺廣三十九尺七寸右統營上船尺量
本板長六十五尺元高八尺中廣十五尺船頭廣十二尺五寸船尾廣七尺五寸
右各邑鎭戰船尺量
統營座副船駕木十六本板十五立
各邑鎭戰船駕木十五本板十二三立
飛荷直板十五立.船尾虛欄 本板十五立在水面不見
전선
배밑(본판)의 길이는 90자, 너비 18자 4치, 높이(깊이)11자3치, 아래층 신방에서 방패 까지 높이 5척, 선두(이물) 너비 15척, 선미(고물) 12자 7치, 상장(판옥) 부분 길이105척, 너비 39척7촌이다. 이는 통영상선의 치수임.
배밑의 길이가 65자, 깊이 8자, 중간부분 너비 15자, 선두 너비 12자 5치, 선미너비 7자5치. 이는 각읍진의 전선치수임.
통영 좌선과 부선의 가목은 16개씩. 본판은 (통나무) 15개를 조립.
각읍진의 전선은 가목은 15개. 본판은 12~3개를 조립한다.
이물비우는 판자15개를 조립. 선미는 난간이 없다.
배밑 본판은 15개를 이어 붙였는데 물밑에 있어 안보인다.
위의 번역내용을 가지고는 도무지 어떤 형태인지 알기가 무척 어렵다. 이를 다시 의미를 중심으로 하나씩 설명해 보겠다.
우선 동양의 배에는 우리가 친숙하게 생각하는 현대선박의 용골이 없다. 물론 중국의 경우, 신안에서 발굴된 신안선처럼 용골이 있는 첨저선도 있었으나 점차 사라지고 정크처럼 용골이 없는 것만 남았다.이처럼 동양권의 배는 배의 척추라고 할 용골이 없는 대신 평탄한 저판이 이를 대신한다. 또다른 특징으로는 늑골이 없다는 점이다. 이런특징들이 배의 구조를 설명하는 글의 이해를 어렵게 한다.
우리배의 경우 배의 기본 구조라고 할 용골과 늑골이 없는 대신 용골의 기능을 하는 본판 이라고 부르는 구조와 늑골 대신 배의 횡강력을 유지하는 가룡(또는장쇠)이 있다. 따라서 전통 한선에 있어서 용골의 기능을 하는 본판은 매우 중요한 것으로, 한선을 설명하는 어느 설명에서나 가장 먼저, 그리고 자세히 다룬다.
이를 염두에 두고 위의 내용을 고찰한다.
판옥선은 3층으로 되어 있는데, 1층은 본체 또는 하체라고 불리고, 일반적인 다른 한선과 같은 형태와 구조를 가진다. 판옥선의 경우 이 부분만을 평전선이라고 부를 경우도 있다. 각선도본에는 전함의 상장을 제거하고 본체만 그린 구조도를 따로 전선 철상장(撤上粧)도로 표시하고 있다. 이렇게 상장을 제거한 평선은 한선 구조를 아주 잘 보여 준다. 우선 굵은 각재 12~15개를 가쇠라고 불리는 긴 나무창으로 꿰뚫어 이어 본판을 만들고 본판 좌우에 삼판이라고 불리는긴 판자 7쪽을 본판위에 이어 붙여 만드는데 앞의 설명에서 원고가 11자3치라는 것은 바로 배의 본판에서 부터 맨위쪽 7번째 삼판까지의 높이로 배의 선체부분 깊이를 말한다. 7번째 삼판에는 마치 우마의 멍에를 메우듯 멍에(가목)가 얹어지고 그 위에 귀틀을 짜고 포판(갑판)을 깐다. 이런 상태를 보통 한선에서는 평선이라고 부르는데, 판옥선의 경우 구조상 선체, 본체, 또는 하체라고 한다. 2층은 판옥선의 가장 특징적인 부분이 되는데, 평선위에 방패판을 설치한 것이 마치 집을 지은 것 처럼 보여 판옥선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이를 판옥상장이라고도 하는데 우선 하체의 멍에 위에 신방 도리를 걸고 그 위에 기둥을 세운뒤 패란을 만든다. 아래층의 신방에서 패란 사이에 방패판을 설치하여 2층을 만드는데 그 높이가 5자라는 뜻이다. 이 부분이 다른 나라 선박에는 볼수 없는 판옥선의 특징으로 배의 이물로 부터 고물까지 배 전체에 선루를 만드는것으로 단순히 상장이라고도 한다.
상장 위에는 양현과 이물에 여장을 설치하였다. 상장의 패란위에 뱃집멍에를 걸고 여기에도 포판을 까는데 이는 청판(廳板)이라고 한다. 따라서 판옥선은 갑판이 두개인 2층 갑판선이 된다. 청판에는 두개의 돛대(이물돛대,한판돛대)를 뉘었다 세웠다 할 수 있게한다. 3층은 청판위의 누각을 말하는데 여기가 현대함선의 함교에 해당한다. 통제사나 수사가 이곳 누각에서 지휘를 하게 되며 장대(將臺)라고 부른다. 또한 청판에는 기를 올리는 깃대도있다.
왼쪽그림에서 보듯 판옥선(한국식 배라는 뜻으로 한선으로 표현 했다)구조는 서양식에 비해 구조적으로 큰 차이를 보인다. 우선 서양선이 사각형 용골을 놓고 거기에 외판을 받쳐줄 늑골을 설치한뒤, 비교적 얇은 판자로 외판(현판)을 조립하는데 비해, 전통 한선의 경우 배의 용골대신 굵은 통나무 여러개를 조립(전선의경우 12~15개를 조립)하여 넓적한 본판을 만든뒤 이 평평한 본판위에 좌우에서 삼판이라고 불리는 외판을 턱붙이 클링커 이음으로 겹쳐 올리고 늑골이없는 대신 좌우 각각의 외판을 양쪽으로 지지하는 가룡목을 배의 크기에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한다.
또한 한선의 경우 배를 건조할 좋은 선재가 부족하여 주로 소나무를 사용하여 만드는데 우리나라의 선재용 소나무는 강하기는 외국의 선재와 비슷하나 휘기가 매우 어려워 자연히 투박한 상자형의 배가 되었다. 이렇게 용골이 없는 구조는 동양형 선박의 특징인데, 늑골이 없어 배가 찌부러지는 것을 막기 위해 중국선의 경우 필요 이상의 격벽을 설치하여 격벽이 배의 모양을 유지하게 하고, 우리 나라 전통 한선의 경우 외판 하나 하나마다 가룡목을 설치하여 배의 횡강력을 유지한다. 그런데 가룡은 외판판자 하나 하나를 꿰뚫고 끼워맞춤식으로 설치되어 있어 선체가 매우 견고해진다. 이렇게 만들어진 선체의 앞뒤를 역시 판자로 막아 일종의 상자형 배를만든다. 따라서 배의 밑이 날카롭지 못하고 구조상 평저선형이 된다.
왼쪽 아래의 그림은 판옥선의 상장을 제거하고 위에서 본 모습을 그린 것으로, 각각의 삼판마다 가룡목이 끼워진 모습과 가목이 현판에 끼워진 모양새를 보여준다. 이렇게 가룡목과 가목에 의해 배의 횡강력이 유지되며 자연스럽게 칸이 나뉘어지는 구실을 한다. 거북선에서는 이렇게 나눠진 각방에 병사들의 휴게실과 무기고를 만들었다. 또한 중국선의 격벽이라는 것은 이 그림의 가룡목이 판자로 바뀐 것으로 풀이 하면 쉽게 이해 할 수 있다. 본체가 만들어지면 선체의 가장 위쪽 외판위에 가목(멍에)을 외판 깊숙히 끼워 넣는식으로 설치한다. (가목의 위치는 가룡목과 같아 전선의 상장을 제거한 그림에는가목만 보인다고 했다) 가목이 설치되면 여기에 귀틀을 짜고 포판(갑판)을 설치한다. 여기 까지 만들어 진 것을 평전선 이라고 부르는데 판옥선은 이 위에 판옥(판자집)을 지었다는 뜻이다.
평선의 멍에가 현측외로 튀어나온 멍에뺄목 위에 현란을 설치하고 기둥을 세운뒤 참나무로 만든 방패판을 세운다. 이 방패판 위에 언방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패란을 설치한다. 패란 위에도 귀틀을 짜고 포판을 까는데 이를 청판이라고 부른다. 청판 위에는 현대 함선의 함교라고 할 장대가 만들어 지고 두개의 돛대도 설치한다. 청판의 좌우와 앞에는 여장을 설치하는데 뒷부분에는 여장을 설치하지 않는다.
이상이 판옥전선의 만듦새를 설명하는 원문을 주해한 것이다.
특징
판옥선은 우선 다층 전함이라는 점이 가장 큰 특징 이다. 전시대의 전함들이 모두 평선이기 때문에 갑판위에는 전투원과 비전투원인 노꾼이 함께 있게 되어 전투효율이 떨어지는데 비해 판옥선은 비 전투원인 격군(노꾼)을 판옥내에 숨기고 전투원은 상장위에서 적을 내려다 보며 공격할 수 있게 된것이다. 또한 판옥선의 상장위 넓은 갑판은 대포를 설치하기에도 좋으며 사정거리도 늘릴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당시 대포는 지금처럼 쉽게 사각을 올릴 수 없고 고임목을 끼워넣어야 하는 불편한 방식이었다) 이외에도 판옥선의구조적인 특징은 우선 동양형 선박의 특징과 판옥선 만의 특징으로 나눠 볼 수 있는데, 우선 동양선박의 특징인 용골과 늑골이 없는 점이다.
용골 대신 본판이라는 구조가 용골을 대신한다. 때문에 바닥이 평평하다.
용골에 가로 놓여 배의 횡강력을 유지하는 늑골도 없다. 대신 가룡목이 이를 대신 하는데, 가룡목은 좌우 현판 부재 하나 하나를 지지 한다. 따라서 한선은 공법상 외각을 먼저 만드는 shell first 공법으로 만들어 졌다.
선수(이물) 역시 넓적한 판재로 만들어 배의 모양이 상자형이 된다. 이 때문에 조선시대의 여러 기록에서 우리 배가 둔중하고 속력이 느리다는 단점이 나열되곤 했다. 이런 형태는 중국에도 나타나 정크와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두번째로 판옥선만의 특징은 갑판 전체에 걸쳐 설치되는 선루이다.
선수로 부터 선미까지 배 전체에 선루가 설치되어 있다. 이렇게 마련된 선루를 상장이라고 한다.
선체폭 보다 훨씬 넒은 선루를 가지고 있어 노를 선체와 선루 사이에 내밀게 되어 있어 전투시 노역에 종사하는 비전투원을 보호한다.
상장위의 넓고 평평한 공간은 대포를 설치하기 좋은 자리를 마련하여 전투 효율을 높였다.
우리나라 최초로 만들어진 순수 전투용 함선이다. 이전의 전함들은 평화시 세곡을 운반하는데 쓰이는등 수송선 기능을 겸하게 되어 있으나 판옥선은 순수한 전투용 함선이다.
선체 보다 넓고 평평한 선수부 상장은 전함의 선수쪽 화력을 높여적을 추격할때 유리하다.
배를 건조한후 일정 기간이 경과하면 배 전체를 해체하여 새로 조립한다. 이는 판옥선 뿐만아니라 한선 전체의 특징으로 한선은 나무못으로 끼워 맞춤식으로 건조 되었기 때문에 일정 기간 경과후, 배를 해체 수리 할 수 있다.
배밑이 평평하고 두꺼워 썰물때 갯뻘에 배가 안정되게 안치할 수 있고, 육지에 끌어 올려 풍랑에 대비할 수 있다.
해전술
이와 같은 판옥선의 장점은 특히 왜와의 전투에서 매우 큰 효과를 가져오는데옛날 해전은 대개 적함에 나란히 기대어 적함으로 넘어가 칼싸움을 하는 전술로 로마해군은 이를 위한 사다리까지 준비하고 다녔다. 이런 전술은 16세기 유럽은 물론 전세계 어디에서나 가장 흔한 전법이었다. 물론 왜군도 당연히 이런 전법을 쓴다. 예를 들어 중종실록의 기록에 "왜적이 칼을빼어 들고 배안에 뛰어들면 맹사(猛士)가 아무리 많아도 당해낼 수없다"라고 한 대목이나, 임진왜란때 왜의 큰 전함인 대흑주에는 대포가 겨우3문, 그것도 구경 3cm짜리가 장치된 반면 일본도가 200자루나 되는점들은 역시 왜 수군이 접전에 능하며 단병접전 전술을 채택한 때문이다.그러나 우리나라와 중국의 해전술은 주로 궁시에 의한 적선의 소각이 첫번째 전법이었다. 따라서 우리 수군은 많은 함포를 사용했는데, 그 구경도 왜의 것보다 커서 보통 90 ~ 130 mm 정도였다.(16세기 당시로는 초대형 함포라 할 만하다)
때문에 적이 우리 배에 올라오지 못하게 하는게 중요 했다. 따라서고려말에 뱃전에 칼을 꽂아 만든 검선이라든가 과선(戈船)등이 나오게 된것도 검술에 익숙치 못한 우리의 해군을 보호하고 활로 공격하기 위함이다. 이런 전통의 결정체가 바로 판옥선이다. 판옥선은 우선 선체가 이층으로 되어 노역에 종사하는 비전투원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2층의 높은 곳에서 적을 공격한다. 따라서 적은 판옥선의 2층 높이에 오르기가 어렵고 반면에 판옥선의 입장에선 적을 내려다 보며 공격할 수 있다. 이처럼 적의 장기인 접전을 막고 우리의 장기인 궁시에 의한 공격효율을 높이기 위해 만들어 진 것이 판옥선 이다. 배가 2층 이라서 적함보다 상대적으로 높아 함부로 뛰어들 수 없고(이점은 왜 수군의기록에 잘 나온다) 많은 화포로 무장하고 있으며, 그 포의 구경도 왜의 함포보다 월등히 커서 천자포의 경우 13cm, 지자포 10cm, 현자포 7cm정도 이다. 전통적인 궁술이 포격으로 발전하여 판옥선의 천자대포는 산탄 200발을 현자대포는 산탄 100발을 쏠 수 도 있었다. 당연히 사정거리도 월등히 길어서 왜의 조총이 대게 200m사거리에 유효사거리 50m인데 비해 세종때 기록을보면 천자포가 1500보 지자포가 900보 현자포 800보 정도이다. 비교가 안될만큼 큰 것이다.
이처럼 판옥선은 우리의 장기의 궁술과 포격전을 유리 하게 이끌기 위한 충분한 장소 제공과 적의 단병접전을 방지할 높은 보루의 역할을 할 판옥을 배위에 만듦으로 적의 전술을 무용지물로 만들고 아군을 유리한 위치에서 싸울 수 있도록 만들었다.
화력
판옥선의 화력은 구체적인 자료가 없기 때문에 간접적인 증거에 의한 불확실한 것들이 많다. 이 점 앞으로 추가 해야할 것들이다.
전통적으로 불화살 공격에 의존하던 우리 전함에 함포가 설치되기 시작한 것은 고려 말로 알려지고 있다. 고려 우왕 7년 최무선은 금강 어구에서 왜구의 배 500척을 화포로 공격, 분멸 시켰다. 또한 정지(鄭地)장군은 우왕 9년 전함 47척을 이끌고 남해 관음포에서 적선 120척을 격멸했는데 이는 탑재 함포를 가지고 해상에서 적함을 격멸한 것으로 최초의 함포에 의한 포격전으로 세계해전사에서도 최초라 할 만큼 의의가 크다. 이처럼 우리는 일찍부터 전함에 함포를 탑재 하기 시작했다.
고려시대 이미 함포를 사용한 우리나라는 조선조 세종때 화기의 전면개량 이후 더욱 강력한 함포를 가지게 된다. 우선 세종때에는 그동안 중국식화기를 주로 사용하던 것들을 국산화 하기 시작하여 천(天), 지(地), 현(玄), 황(黃)의 총통(화포)을 만들고 대장군포등과 요즘의 박격포라고 할 '완구'등을 만들게 된다. 또한 기존의 화약을 개량, 사정거리를 늘리게 되는데, 천자포의 경우 종전의 4 ~500보 나가던 것을 개량후 1000 ~ 1300보로 늘리게된다.
포탄
특히 조총이나 서양의 불량기들이 둥근 돌덩이나 철탄을 쏘게 된 것들로 폭발형 포탄이 아니기 때문에 파괴력이 크지 않은데 비해 우리의 경우 진천뢰라는 폭발형 포탄을 사용 할 수도 있었다.(임진란때 이순신도 사용했던 기록이 있다) 또한 우리의 총통은 포탄 뿐만아니라 여러발의 화살이나 수백발의 수마석(물에 침식되어 둥글게 된 작은 돌)을 포탄 대신 사용 할 수 있었다. 이들 화살들은 일종의 산탄 효과를 낼 수 있어 화력을 배가 시킨다. 천자포의 경우 수마석 200개를, 현자포의 경우 100발을 발사 했다.
이런 산탄 이외에 대형 화살도 포탄으로 사용 했다. 천자포용 으로 만들어진 장군전의 경우 직경 120mm, 길이 180cm정도에 쇠날개가 달려있으며, 현자포용의 차대전은 구경 60mm, 길이 160cm정도가 된다. 이런 류의 편전들은 일본측 기록에도 나오는데 조선의 화살은 직경이 한자(1尺)나 되어 우리배(일본전함)의 돛대가 한방에 부려지는 등 질 수 밖에 없다고 보고하고 있는데, 이는 바로 장군전에 맞은 것을 이렇게 쓴 것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이 무기가 장군전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런 무기가 없는 임진란 당시의 왜군은 이를 그냥 화살이라고 밖에 표현하지 못한 것이다. 일부 현대의 연구에서 이를 일본의 과장이라고 무시하고 신뢰를 주지 않는 것은 잘못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하나 우리나라의 대포를 총통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포탄 뿐만 아니라수많은 화살을 산탄처럼 쏠 수 있기 때문에 총통이라고 부른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폭발형 포탄과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수마석 200개를 넣고 쏘는 천자포라면 조총 200자루와는 비교가 안되는 파괴력을 낼 수 있다. 당시 왜군은 조총의 밀집사격방법을 고안(도요토미 히데요시의스승인 오다 노부나가 가 단조산에서 왜의 사무라이를 농민병으로 대항할때 처음 썼다고 한다) 위력을 떨칠 때 였으나 아무리 밀집사격을 해서 명중률을 높인다 해도 유효사거리가 50 m 밖에 되지 않는 조총은 판옥선의 두꺼운 참나무 방패판을 뚫을 수 없다.
또한 이런 수마석이나 대형 장군전 이외에 소형 화살에 가죽 날개를 붙여 총통에 여러발을 장전, 발사할 수 있게 만든 피령전도 사용 하였는데, 피령전은 대개 조금 작은포에 여러발을 넣어 쏘았다. 세종때에는 피령전을 8발씩 한번에 쏘는 8전 총통등이 있었다. 이런 화기 이외에도 요즘의 로켓탄에 해당하는 신기전등도 사용 하였다. 신기전은 화살에 작은 로켓을 달아 자체 추진력을 가지게 만든 것으로 적함을 불 살라 버릴 수 있었다.
현존하는 명종, 선조때의 화포
화 포 제조연대 전장(cm) 구경(mm) 소장처
전자총통 명종 10년(1555) 130 128 육사박물관
지자총통 명종 12년(1557) 88.8 100 육사박물관
지자총통 중종 32년(1537) 91 95 일본
지자총통 명종 12년(1557) 91 100 일본
현자총통 명종 10년(1555) 76 67 일본
현자총통 선조 1년(1568) 74 64 일본
김재근 저 우리배의 역사에서 인용
당시에 판옥선에 함포를 몇 문이나 탑재 했는지는 기록에 없다. 그러나 탑승원을 구분한 것을 보면 포수가 24 ~ 26명 정도이다. 이외에 화약을 장전하거나 포탄을 나르는 화포장이 10 ~ 14명이 있고, 활을 쏘는 사부가 18 ~ 22명이 있다. 그렇다면 대체로 약 20문 정도의 총통을 장비했을 것 같다.(순수한 짐작임.아시는 분은 알려주시길)
그리고 정조대왕때 발간된 이순신장군의 전기인 이충무공전서에서는 '모든 총포구멍에 총포를 걸고 쉴새 없이 쟁여 쏜다'라는 말이 있으며 이때 통제영 거북선이라면 대략 70문의 총포혈이 있으니 탑승원들중 포수전원인 사격을 한다는 뜻일 것이다. 이를 기준으로 보면 대략 20문 이상의 함포와 소총(승자총) 약 20자루정도의 화력일 것으로 보인다. 또한 당시 판옥선은 주력함이고 거북선은 돌격선이었으나 거북선이 특별한 배가 아니라 판옥선을 개조한 것이기 때문에 화력은 비슷했을 것이다.(이것도 추측)
전선의 정원(숙종때)
판옥선 귀선 병선
격군 100 ~ 120 90 ~ 100 14
포수 24 ~ 26 24 2
화포장 10 ~ 14 8 .
사부 18 ~ 22 14 .
타공 및 기타 12 12 1
김재근 저 우리배의 역사에서 인용
판옥선의 추진
동양의 경우 이미 송나라때 부터 다범장을 갖추고 있었으며 우리나라도 역시 돛대가 두개 이상인 다범장선을 신라때에도 운용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일본에 남아 있는 기록으로 볼때 백제식으로 만든 배나 신라의 장보고 청해진대사가 사용한 무역선들이 모두 돛대를 두개씩 장비한 다범장선이었다. 유럽의 경우12세기 말 한자동맹 도시들의 코크선들도 단순한 횡범 하나뿐인 조악한 선박이었던 점을 감안 한다면 매우 뛰어난 선박건조술과 조종술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게 해주는 단적 증거가 된다.
또한 범선의 돛은 대게 종범과 횡범으로 나뉘는데 서양선의 경우 횡범은 순풍을 받아 항해하는데 유리한 반면 역풍시 진행이 어렵고 종범은 역풍에 강하나 조종에 많은 인원이 소요된다. 특히 서양의 경우 횡범은 바이킹선이나 고대 그리스의 갤리선에 사용되었고, 종범은 베네치아등 후대 지중해 선에 많이 쓰였다. 이후 15세기 지리탐험이 시작되면서 비로서 이 두가지 종류의 돛을 갖춘 전천후 다범장선박들이 서양에 나타난다. 이에 비해 동양의 선박은 일찍부터 이미 여러개의 돛을 장비하고 항해했는데, 조선시대의 판옥선이나거북선 등도 돛대를 두개 정도씩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 돛은 모두 현대 중국의 정크에서와 비슷한 일종의 러그 세일로 돛의 상하변에 가프와 붐을 달고 그 사이 2 ~3자 간격으로 바텐(활대)을 돛폭에 꿰어 시트라는 줄로 돛폭을 조종 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이런 돛은 조작하기 용이하고 종범과 횡범의 장점을 고루 갖춰 역행성능이 우수한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우리나라 전함들의 역풍시 강점들은 이웃 중국측 기록에 자주 보이는데, 명나라 화옥(華鈺)의 해방의(海防議)에서 '조선의 귀선은 돛대를 세우고 눕히기를 마음대로 하고 역풍이든 퇴조 때이든 마음대로 갈 수 있다'고 했다. 각선도본의 판옥선과 이충무공전서의 거북선들은 모두 두개의 돛대를 눕혀 놓고 있다. 또한 앞에서 보인 삼도수군조련전진도의 천자 1호좌선의 경우 이물 돛대는 세워 돛을 펼치고 한판돛대는 눕혀 놓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또한 판옥선의 경우 범주 이외에도 노를 이용하여 접전시의 기동성을 살렸는데, 이는 동양의 옛날 군선들의 기본적인 특징이다. 물론 서양의 경우에도 16세기까지 운용되고 스페인 무적함대에도 끼어 있던 갤리아스같은 배도 노역을 위주로한 요범선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판옥선은 기본적으로 범선이고 다만 역풍 및 전투시의 기동성을 위한 노가 장비되어 있었다. 특히 판옥선의 노는 큰노 한개를 여러사람이 함께 젖는 것이었다.(판옥선이나 거북선의경우 노 하나당 인원이 5명씩 젖는 것이었다)
이에 비해 일본의 전함들은 주로 횡범 하나에 한사람이 젖는 작은 노가 여러개 달린 조악한 전함으로 임진란때에도 이런 배로 침입해 왔다. 팔왕자신송원에 보관되어 있는 왜선 모형을 보면 한사람이 젖는 노가 100개 장치되어 있고 돛도 하나 뿐으로 순풍에서나 쓸 수 있는 횡범이다.
임진왜란에서의 판옥선
임진왜란에서 첫 해전은 개전후 25일만에 있었던 옥포해전이다. 충무공은 5월 4일 출전하여 5월 8일 옥포만에서 적 선단을 포착 26척을 격침시켰다. 이때 상황을 충무공은 장계를 통해 선조에게 보고하게 되는데 이를 분석해 보면 옥포해전에서는 판옥선 28척과 협선 17척, 포작선(어선) 46척을 거느리고 출동 하였다. 이때 포작선과 협선은 전열함으로 볼 수 없으며 실제 전투시 에는 판옥선이 주력이 된다. 또한 판옥선의 위력을 간접적으로 말해주는 것이 전투에 소요된 시간인데 장계를 보면 옥포앞바다에서 12시였고 전투를 마친뒤 영등포에 온시간이 오후 4시경이었으니 대략 해전에 소요된 시간은 1시간 정도였다. 그사이에 우리측은 단 한사람의 부상병도 없이 적선 26척을 격침 시켰으니 그 위력이 얼마나 대단 했는지는 구지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 해전에 뒤이어 다시 같은날 저녁 5척을 또 추격 격침시켰고, 적진포에서 13척을 추가로 격침시켰다. 이것이 충무공의 1차 출동이다. 5월 29일 제 2차 출동에는 23척의 전선이 출동한다. 이때는 거북선이 3척 따라가게 된다. 이순신장군은 이때 이후 판옥선과 거북선을 함께 전선이라고 부르고 출격때에도 전선의 숫자만 장계에 보고하고 있다. 사천포에서 왜의 층루선 12척과 왜성을 쌓고 있는 왜군 400명을 분멸시키고 다시 당포에서 판옥선 만큼 큰 왜 층루선 9척, 중소선 12척을 모두 격침 시키고 왜장의 목을 베었다. 이후 당포 근처에 머물던 조선 함대에 이억기 수사가 전선 25척을 이끌고 합세하여 전선이 모두 51척으로 늘어난 연합함대는 당항포, 율포등에서 적선 72척을 격침시켰다. 다만 이때에는 전상자가 전보다 많아 사망자가 12명이나 되고 부상이 34명이나 되는데 이순신 함대에서 최초로 적의 칼에 의한 사망자도 1명 나오게된다. 3차 견내량 해전에서 적의 대형 층루선 35척, 중간배 17척 작은배 7척등 총 53척을 격침시켰으나 조선측은 부상자 118명에 사망 19명 뿐 침몰한배는 한척도 없다. 특히 부상, 사망자의 경우도 모두 포탄에 당한 것으로 이순신의 판옥선 함대는 마치 현대의 함대처럼 순수한 포격전으로 적을 무찔렀다. 특히 견내량은 마치 바다의 문경새재와 같은 지형으로 폭이 좁고 물살이 빨라 지협을 막아서는 전법으로 소수의 병력이 큰 병력을 쉽게 막을 수 있는 요새지인데 이순신장군은 이날 견내량을 내주고 대신 바다 한가운데에서 학익진을 벌려 적을 포위하여 인위적인 견내량을 만들어 적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다시 안골포에 왜 수군장 구끼의 함대를 무너뜨리고 적에게 시위하였다. 이때 일본측의 임진왜란 전사 연구가 가다노의 추산으로는 견내량(한산도)에서 약 1천명 정도, 안골포에서 2천5명정도의 사상자가 났다고 한다(삼가 적을 무찌른일로 아뢰나이다, 정광수, 정신 세계사.1989) 이상에서 처럼 판옥선으로 이루어진 조선 수군함대는 한척의 피해도 없이 왜 수군을 무찔렀는데, 이는 판옥선의 성능을 단편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판옥선이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
판옥선이 이처럼 뛰어난 전함이었는데도 불구 하고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우선 판옥선이 가장 활약한 임진란 당시에 벌써 전선으로 불리워지고 있었으며, 이충무공 당신도 판옥선과 거북선을 한꺼번에 전선으로 통칭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아마도 당시로는 전열함이라는 의미로 전선이라는 명칭을 판옥선과 거북선을 함께 부를때 사용하기도 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개발 당시 일반 선체위에 방패판으로 집을 지은 것과 같다는 의미로 판옥선이라 불리웠지만 나중에는 그 기능이 전투함 이기에 전선(戰船)이라고 불리게된 것이다.
또한 조선시대는 명분론, 절개론, 예절론이나 고담준론적인 철학사상에 매달려 있었기 때문에 전쟁에서도 무기나 전술등의 실제 전력보다는 동래부사의충절이나 어느 부인의 절개등에만 관심을 두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우리는 비격진천뢰라는 당시로는 획기적인 폭발형 포탄을 사용한 일이라든가 판옥선의 뛰어난 전투력 따위를 무시하고 지냈던 것이다. 물론 이런 뛰어난 전함도 전술이 잘못되면 칠천량의 원균처럼 허무하게 무너질 수 도 있다. 그러나 이때도 원균이 인간성이 나쁘거나 간신이라서 진것은 아니다. 원균은 나름대로 훌륭한 장수 였으나(특히 그는 당시 일반적인 전법인 단병접전에 매우 능한훌륭한 장수였다) 그의 전술이 잘못되어 큰 패배를 하게 된 것이다.
지금도 우리는 임진란 해전연구를 당시의 무기체제나 전술등의 연구는 제쳐두고 이충무공의 충절등 철학적인 조선시대적 연구에 매달려 있다. 이런 여러가지 이유로 우리는 판옥선이라는 훌륭한 전함을 잊고 지내온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이충무공이 이런좋은 장비에 의지해 전쟁에 이긴 것이라면 누구나 가능하지 않았겠는가 하는 오해를 할 수 도 있는데 절대로 그렇지는 않다는 것이다. 이미 임진왜란은 16세기 당시의 총력전이었다. 따라서 한두가지 요소 만으로 전쟁의 승패를 가릴수는 없다. 게다가 이순신 함대 역시 지휘권이 원균 수사에게 이양된뒤 전술의 실패로 칠천량에서 거의 전멸하게 된 것은 함선만으로는 승패가 갈라지는 것이 아님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충무공은 당시 아무도 준비하지 못한 전쟁을 홀로 준비하셨다. 특히 제 1차 출동때를 보면 다른 함대가 미처 준비하지 못하고 있을때 홀로 출동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대비와 훈련이 되었었는데 이런 훈련과 좋은 장비를 갖추는 것도 장군의 기본 능력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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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을 쓰는데 참고한 서적들
우리배의 역사 (김재근, 서울대 출판부)
한국의 배 (이원식, 대원사)
거북선의 신화 (김재근, 정우사)
삼가 적을 무찌른 일로 아뢰나이다 (정광수, 정신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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