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릴적 이야기
나대용 장군의 자는 시망, 호는 체암, 본관은 금성(錦城)이고, 삼한벽상공신 나총례의 후손으로서

부친은 항, 모친은 광산 김씨이다.  

고향 나주는 고려 태조의 해상 격전지였고,  또 고려말 정지 장군의 태생지였다. 어린 시절 나대   용은 물방개를 비롯한 수중곤충을 잡아서 가지고 노는 것을 즐겨했다.
나대용은 물방개처럼 물속을 자유롭게 다니면서 적선의 배 밑바닥을 공격하는 군선을 생각했다. 실제로 나대용은 속은 비고 겉은 나무로 둘러싸인 물방개를  닮은 기묘한 배를 모형으로 만들어   보기도 했다.  하지만 물속으로 다니는 배를 만드는 것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함을 깨닫고,  거북   이가 물위에 떠있는 듯한 모양의 배를 만드는 것으로 생각을 전환했다.      
나대용은 좀체로 말이 없었지만 학문을 닦는데는 열성을 다했다. 그 또래보다 모든일에 지혜로워서 어릴 적부터 서당에서도 스승님과 또래들의 사랑과 신망이 두터웠다. 부모님께는 늘 효성스런   아들이어서 마을사람의 칭송이 자자했고, 부모님들과 친척들은 그런 대용에 대해서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정지 장군과 한 고장에서 태어난 대용은 어릴 적부터 들어온 정지 장군의 용맹스러움과 대포를 쏘는 전선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때 마다 다른 아이들처럼 결코 흘려 듣지를 않았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꿈을 고이고이 키워오던 대용은 얼마전부터 이 방죽골에 자주 와서   손수 나무를 베어다 깍고 다듬어서 거북이를 닮은 배를 띄어보곤 했다.


 2. 거북선 발명
당시 고려-조선 수군의 역사를 간략히 살펴보면, 고려말에 왜구의 약탈은 극심했다.  고려말의    왜구는 소규모적인 해적집단이 아니라 보급품을 마련하려는 대규모적인 정규전투집단이었다.  

이들은 해안지방은 물론 내륙까지 깊숙이 침투하여 노략질을 일삼았다.  고려조정은 이들에게 매우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심지어 고려조정은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왜구의 개경함락에 대비해  도성을 내륙지방인 강원도 철원으로 옮기려는 생각까지 심각하게 고려할 정도였다.

 

고려조정은 많은 논의 끝에 왜구에 대한 대책으로 수군을 창설하기로 결정내렸다.  수군 원수에   는 재원교포2세로 원나라에서 화약무기를  이용한 전술을 공부하고 돌아온 나세(羅世)장군을 원   수로 임명하고 부원수에는 화약무기 제작기술을 갖고 있는 최무선을 임명했다.  

고려수군을 지휘한 나세 원수와 최무선 부원수는 왜선을 향해 대장군전을 발사해 왜선 500여척   을 모두 파괴하고 불살랐다. 이것이 바로 군산 앞바다에서 있었던 진포대첩이다.   이 해전은 세   계최초의 해상 원거리 포격전이었다.

곧이어 정지장군은 1383년(우왕9)에 대포를 실은 47척의 군선으로 왜적선 120척을 남해 관음포   에서 선두에 있던 왜의 대선 17척을 격침 하고 적을 달아나게한 관음포대첩을 성공시켰다.

여기에서 자신감을 얻은 고려조정과 조선조정은 잇따라 박위와 이종무를  시켜 대마도 정벌을    단행했고,  위협감을 느낀 대마도주는 대마도민들이 해적질을 중단하도록 했다. 
                  
오롱골 마을 앞에는 넓은 들이 펼쳐 있는데, 고막강의 상류로 바닷물이 들어와 동구 앞 배다리에   는 많은 배들이 드나들었다. 이러한 해변에서 성장한 나대용은 바다와 친숙했다. 고향에서 열심   히 학문을 닦으며 한편으로는 무술공부에 전념했다.


나대용은 이미 무관이 되어 몸을 바치기로 작정을 하고, 활쏘기 창던지기 등 무예닦기에 전념하   다 27세 때 훈련원 별시에 합격을 하였다. 그후 나대용은 1587년 되던 해 나이 32세(선조 20년)   에 훈련원의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거북선 연구에 본격적으로 뛰어 들게되었다.  나대   용은 산학(算學:지금의수학)을 공부하면서 동시에 배에 관한 서적의 독서,  모형제작등의 일을    하면서 거북선 연구를 했다. 당시 국가에서 하는 대규모 토목공사에는 산학가(算學家)라 하여 수   학계산만을 전문적으로 하는 중인계급의 관리가 있었으나 개인적인 발명을 하는 사람은 자기 스   스로 산학을 공부해서 자신의 발명품에 치밀한 수학적 계산을 적용해야 했다.
나주 거평 오롱골 앞 방죽골에서는 대용이  할 수 있는 부분까지는 거북선 실험이 성공적으로    끝나가고 있었다. 나대용은 모든 연구의 결 과를 세밀하게 하나하나 적어서 보관하였다.

나대용은 삼국시대 이래로 지금까지 우리가 만들었던 군선들의 설계도를 모두 살펴보았다. 조선   의 개국초부터 명종 때까지 사용되던 대맹선(80명 탑승), 중맹선(60명 탑승), 소맹선(30명 탑승)   이 있었다.  맹선은 세곡 운반에 주로 쓰이는 배이다보니 전투함으로써는 효율이 떨 어졌다.

현재 조선수군의 주력선인 판옥선이었다.  중국해적의 해적선을 모방해서 만든 군선이었다.

정원이 이백여 명이 다 되어 대 맹선의 두배가 넘었다. 판옥선의 특징은  칼에 능한 왜군들이 오

르지 못하도록 배를 크게 만들고 맨위 이층으로 상갑판을 높인 것이다.  상갑판을 높 인 결과 우리군사의 주특기인 활을 좀더 쉽게 멀리까지 쏠 수 있는 장점까지 생기게 되었다. 하지만 배의 앞   뒤 부분이 상대적으로 낮아서 적의 침탈을 자주 받게 될 위험이 있었다. 상갑판 위의 군사들이   완전히 노출되어 있어 적의 활이나 창의 표적이 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고려현종(1011년)때 부터 숙종(1097)때까지 근 백여년 동안 고려수군은 과선(戈船) 일흔다섯 척   을 만들어 왜구를 섬멸했다고 기록에 나와있었다.  과선은 배의 좌우에 칼을 빽빽하게 꽂아 왜구   의 침입을 막았다. 선두에는 쇠로 만든 뿔을 달아 왜선을 부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과선과    함께 관심을 기울였던 또 하나의 배는 별맹선이었다. 맨 위의 갑판을 둥글게 만들어 완전히 덮어   버리고 상갑판 맨 위의 군사들을 판옥내에 배치시킨 전선이었다. 흡사 거대한 자라가 바다에 떠   있는 모양이었다.

나대용은 과선과 별맹선의 장점만을 추려 판옥선의 장점과 합쳐서 거북선을 설계했다.판옥선과    대략 비슷한 구조물에 별맹선처럼 상갑판을 완전히 덮어 씌운 뒤 그 위에 과선처럼 칼과 창 송   곳 따위를 꽂는 구조였다.  선수 앞에는 도깨비 머리를 달아 현대의 구상선수(bulbous bow)역할   과 충격돌기 역할을 하도록 했다.  이렇게 되면 저항을 적게 받아 배가 빠르게 되고, 거북선으로   적선의 측면을 들이받이면 쉽게 적선을 격침시킬 수 있게된다. 배의 맨 앞에 용머리를 달아서 그   입으로 대포를 발사하고, 선미인 거북 꼬리로도 역시 대포를 쏘도록 했다.  바깥쪽 판자의 두께   를 네치 이상으로 하고 좌우로는 여섯 개 이상의 포를 동시에 쏠 수 있도록 포혈(포구멍)을 만들

 었다. 노를 여덟개씩 좌우에 달고 돛을 달아 바람의 힘도 이용을 하도록 했다.  또한 배에 쉽게   불이 붙는 것을 막고 적군이 배에 올라타 도끼로 배를 파괴하는 것을 막기 위해 철판도 덮는 구   조로 설계했다.

 

거북선 =   판옥선(평저선 구조, 다층구조)  +과선(창검으로 도선저지, 충각돌기) 

 +별맹선(상갑판을 덮어서 전투원 보호)

3. 이순신 장군을 찾아가다
나라가 더욱 어지러워진 1591년(선조 24년)2월 13일에 이순신 장군은 전라좌수사에 임명 되었   다. 이것은 이산해,유성룡 등이 아무래도 왜국의 침략이 있을 것 같다는 예감에 이순신을 추천하   여 발탁된 것이다. 한편 나주 거평 방죽골에서 8년 간의 연구끝에 거북선 모형의 실험제작에 성   공한 나대용은 사촌동생 나치용과 함께 덕망 높은 이순신장군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했다는 소식   을 듣고 먼길을 달려 여수로 갔다.   몇 번이고 거북선의 설계도를 보고 또 보고 하던 이순신은   그 자리에서 나대용을 군선과 무기제작 책임자인 감조전선 출납군병군관(監造戰船出納軍兵軍官) 에 임명하였다. 이윽고 나대용은 군선과 무기제작 책임자의 신분으로 전라좌수사 이순신을

도와   각종 군선과 무기를 만드는 일에 힘을 썼다.


< 이순신 행록>에서 다음과 같이 거북선을 설명했다.

『… 크기는 판옥선과 같고, 위에는 널을 덮었는데  널에는 십(十)자형의 좁은 통로가 있으며 그   곳을 제외한 자리에는 칼모양의 송곳을 꽂아 발 붙일 곳이 없도록 했다. 앞에는 용머리를 만들어   그 아가리가 총구멍이 되고 뒤에는 거북꼬리를 만들어 그 꼬리 아래 총구멍을 내었다. 그리하여   좌우에 각 6문의 총구멍을 내었는데 그 전체의 모양이 흡사 거북과 같았으므로 이름을 거북선이   라 했다.  적을 만나 싸울 때에는 거적으로 송곳과 칼위를 덮어 선봉이 되어 나아갔다.   적이    배에 올라 덤비려 들다가는 칼날과 송곳에 찔려 거꾸러졌고, 에워싸고 공격하려 하면 좌우전후에   서 한꺼번에 총통을 쏘니, 적선이 바다를 덮듯 몰려와도 이 배는 그 속을 마음대로 드나들어 가   는 곳마다 쓰러지지 않는 놈이 없었기 때문에 크고 작은 모든 해전에 승리를 거두었다.』
거북선에 대한 것으로 1883년의 영국의 해군기록을 보면 『Korea의 전선은 쇠판자로 배 몸뚱이   를 싸서 당시 일본의 나무 병선을 깨트렸는데 이는 세계에서 가장 오랜 철갑선으로 한국인이 처   음 발명한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일본의 문서에도 거북선에 대한 감탄과 공포가 잘 기   록되어 있다.

이순신과 나대용의 마음 같아서는 수십 척이라도 만들고 싶었지만 전라 좌수영의 재정에는 한계   가 있어 일단 3척을 만들기로 했는데  그 중 한 척이 먼저 완공되어 3월27일 처음으로 대포를    장착하고 쏘아본 것이다. 드디어 4월 12일은 상부에서 내려온 남한이라는 사람앞에서 발포식을   갖는 날이었다. 이순신은 거북선 완성 소식을 즉시 전라감사 이광에게 보고 하였더니 곧 바로 군   관 남한이라는 사람을 내려 보낸 것이다. 나대용의 치밀한 설계로 동시 다발적인 대포의 진동에   도 거북선은 끄덕이 없었다.  이리하여 거북선은 임진왜란이라는 난리가 터지기 바로 전날 음지   에서 양지로 나서게 되었다.

4. 출전

4월15일 저녁이었다. 경상 우수사 원균의 군관이 들이 닥친 것이다.   곧이어 다시 또 경상감사   김수의 공문이 당도했다. 앞서의 내용과 똑같은 내용으로 전쟁의 긴박함이 구구절절 베어 있었    다. 이순신은 휘하의 군사들을 모두 소집하여 비상 경계태세에 들어감과 동시에 자신에게 들어온   모든 정보와 현재의 상황들을 소상히 적어 조정에 장계를 올렸다.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원균   을 도우러 경상도로 출전을 하고 싶었지만 전라좌수영은 적이 침입하는 중요한 길목이기 때문에   함부로 비울 수가 없었다. 날마다 경상도쪽과 조정을 바라보며 소식을 기다리는데 드디어 조정에   서 출동명령이 내려졌다.
이순신은 즉시 출동을 명하는 한편 경상도의 원균에게 작전상 필요한 정보를 요구했다.
1. 경상도의 물길사정은 어떠하며,
2. 경상도와 전라도의 수군이 집결할 곳은 그 지점이 어디며,

3. 왜국의 병선 척 수는?  그리고 정박지는 어디인지,
4. 기타 작전에 관계되는 사항에 대해서 소상한 정보를 제공해 달라는 요구였다.
이순신은 또 즉시 자기 관할의 장수들을 불러 모아 회의를 했다. 순천·광양·낙안·흥양·보성 사또   들이었다.   드디어 출전에 따른 작전배치가 시작되었다.

 

선봉장 (원균과의 약속으로 경상우수영 장령 중에서 뽑기로 함)

중 위 장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
좌 부 장     낙안군수     신  호
전 부 장     흥양현감     배홍립
중 부 장     광양현감     어영담
유 군 장     발포만호     나대용(공석인 발포만호직을 임시대행)
우 부 장     보성군수     김득광
후 부 장     녹도만호     정  운

좌척후장    여도권관     김인영
우척후장    사도첨사     김  완
한 후 장     군    관        최대성
참 퇴 장     군    관        배응록
돌 격 장     군    관        이언량

5.옥포승첩
드디어 5월 4일 이순신과 그 함대는 새벽 4시반쯤 경상도를 향해 진격해 나갔다. 함대는 판옥선   24척, 협선 15척, 포작선 46척으로 모두 85척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5월 7일 새벽 함대를 왜적   함대가 있다는 가덕포 방면으로 뱃머리를 향했다. 왜선 30여척이 정박하고 있었다.  그들은 육지   에 내려 마을에 불을 지르고 약탈을 일삼고 있었다.  우리 측의 함대가 진형을 갖추고 진격시키   는 것을 본 왜군들은 허둥지둥 배로 돌아와서 도망을 쳤다.   우리편 배에서는 일제히 화살을 쏘   았다. 왜군은 조총을 쏘면서 대항했으나 대포와 불화살을 쏘면서 이리 달리고 저리 치닫는 우리   군사들의 용맹을 당해낼 길이 없었다.

이 해전에서 우리는 적선 26척을 박살내고 불태워 버렸다. 바다는 불꽃과 연기로 뒤덮혔고 부서진 뱃조각과 왜적의 시체가 둥둥 떠다녔다.  나대용은 이 전   투에서 왜군의 대선(大船) 2척을 격침시켰다.  저녁이 되자 척후선에서 또 신기전이 날아 들었    다. 우리 측이 전 함대를 동원하여 추격을 시작하자 왜적은 죽을 힘을 다해 도망치다가 합포앞바   다에 이르자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쳐 버렸다.  아군은 적선 5척을 완전히 파괴해 버렸다.  

5 월 8일 고리량에 왜선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적진포까지 나아가니 과연 크고 작은 왜선    13척이 발견되었다.  우리측 함대는 즉각 화살과 대포를 쏘아 왜선 11척을 격파했다. 이번 전투   에서는 왜선을 무려 42척이나 때려 부수고 적군 수 백 명의 목숨을 빼앗았건만, 아군은 한 명의   전사자도 없었다. 다만 군사 몇명이 작은 상처를 입었을 뿐이었다. 이번 전투를 통 털어 옥포해   전이라 부르는데 이 승리로 왜적들은 쉽사리 전라도 쪽을 침범하지 못하게 되었다.

 6. 사천 해전
사천에 정박해있던 왜적들의 형태는 전과 많이 달랐다. 400여 명의 적이 산위에 일자로 늘어선   채 진을 치고 있었다.  좌수영 함대가 겁을 먹고 도망치는 것처럼 물러가도록 했다. 이순신의 명   령으로 함대가 물러가는듯 하자 왜적 200여 명이 기다렸다는 듯 산에서 내려와 배를 타고 우리   함대를 뒤따라왔다. 우리측이 적당한 거리까지 적을 유인하다가 갑자기 뱃머리를 돌려 공격하자   정신없이 달아나려했다.  그리고 이날 처음 출격한 거북선이 적진속에 돌진하여 천·지·현·황자의   포를 쏘아대자, 왜선은 큰 혼란에 빠졌다. 그 틈을 노려 우리의 함대가 총공격을 했고, 왜선 12   척은 불길에 싸이고 비명을 지르며 바다에 빠져 죽는 자가 셀 수 없이 많았다.
마침 밀물때라 나대용의 배는 해안까지 들어가 육지의 왜적까지 공격할 수 있었다. 이순신장군을   호위 하면서 용감히 싸우던 나대용이 갑자기 왼쪽 허벅지를 움켜쥔 채 앞으로 고꾸라진다. 총탄   을 맞은 것이다.  이번 싸움에서 이순신 장군도 왼쪽 어깨에 큰 부상을 입었다. 5 월 29일 사천   전투에서 입은 나대용의 상처는 생각보다 깊은 중상이었지만, 그는 게의치 않았다.  이순신은 나   대용을 아끼는 마음으로 쉬기를 명했으나, 나대용은 그 이후로도 크고 작은 모든 전투에 거의 모   두 참여하여 이순신으로 부터 더욱 두터운 신임과 사랑을 받게 되었다.  6 월 2일의 사량전투에   서는 왜장이 탄배를 집중공격하여 침몰시킴으로써 왜군의 사기를 꺾었다.
이  전투에서도 거북선의 활약은 눈부셨다. 천·지·현·황 등의 각종 총포 등을 전방위에서 맹렬히   쏘아대어 왜적들을 정신 못차리게 하였다.  이 해전을 당포해전이라 부르는데 실로 통쾌하게도    적선 21척을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


6 월 4일에는 거제도 방면으로 가다가 연합 함대를 조직하여 이순신이 그 연합 함대의 지휘를    맡았다.   6 월 5일에는 당항포에서 함안군수 유숭인과 함께 소소강 북쪽 기슭에 있는 26척의    함대를 맞아 큰 전투를 벌렸다.  3 층 누각을 높이 세운 왜장의 배를 향해 거북선들이 번갈아    맹렬한 공격을 해대자 왜장이 탄 배는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누각 높이에서 갑옷과 투구   를 쓰고서 지휘하던 왜장이 거북선에서 쏜 불화살에 맞고 쓰러지자,
적군은 당황하여 배를 버리   고 달아났다.  이제 왜적들은 우리 수군만 나타나면 도망치기 바빴고, 거북선을 보면 당황해하며   무서워했다.  이제 해전에서는 거북선이 있는 한 우리와 맞설  왜적이 없었다. 큰 승리를 거두고 여수에 있는 좌수영으로 돌아오던 날은 6월 10일로 이번 출전에서도 왜선 72척을 격파하고, 수 많은 적을 죽이는 큰 성과를 거둔  우리수군의 피해는 전사자   13명에 불과하였다.  또 우리수군의 빛나는 승리는 4개나 되는 적의 수군단과 그 많은 적선을  격멸해 버림으로써 왜군의 보급로를 차단시켜 그들의 사기를 떨어뜨린 것이다.

7. 한산대첩

우리 수군은 7월 6일 거북선을 앞세우고 또 다시 출전을 감행한다. 함선판옥선 5척을 보내어 적   선과 대결하게 한 후 뱃머리를 돌려 후퇴 하는 유인작전을 폈다. 이런 이순신 장군의 작전을 알   리 없는 왜적들은 좌수영 함선을 공격하기 위해 전속력으로 추격해왔다.  왜적은 당시 용인전투   에서 5만 조선군을 물리친 큰 승리를 거둔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지휘를 맡아  사기가 올라 있었   고 자기들이 수적으로 우세하다는 생각에 조선수군을 얕보았던 것이다.
적선이 한산도 앞바다까지 이르자, 도망치던 조선수군의 판옥선이 갑자기 빙그르 180도 돌며 왜   선을 공격하고, 곳곳에 숨어있던 조선 수군이 포위망을 형성했다.  

학익진의 맨 앞에있던 거북선 2척이 돌격해 들어가며, 선두에 있던 왜 수군의 선봉을 순식간에 박살내서 기선을 제압하고 적군의 사기를 꺾었다. 곧이어 왜 수군의 첨자진(尖字陣)을 흐트러트리고 대장선을  박살내서 전술적인 대응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해전이 끝났을 때는 73척의 왜선 가운데 겨우 14척만이 안골포와 김해 방면으로 도망쳤다. 이날 역시 우리측은 적선 47척을 불살라 버리고   12척을 빼앗는 대승을 거두었다.  다음날의 안골포 해전에서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으나, 아군은 1척의 배도 잃지 않았고, 전사자는 19명 밖에 나지 않았다.   왜 수군들은  이 안골포 싸움에서 42척의 배 모두가 불타 침몰하고, 적장 구키요시타카가 겨우 살아 도망쳤을 뿐 대패를 하고 말았다.

8. 첩자 생포 

이즈음 이순신은 전라좌수사겸 삼도수군 통제사가 되었다. 이때 일본군은 수륙 양면으로 물자의   보급을 차단  당하고, 겨울이 되자, 큰 추위의 위력에 고니시의 제1군이 1593년 1월 6일 평양성   전투에서 크게 패하여 퇴각하였다.  또한 가토의 제2군은 함경도 길주성 전투에서 1593년 1월    28일 패전하여 퇴각하였으며, 구로다 나가시마가 지휘하는 제3군도 황해도 연안성 전투에서 패   전하여 퇴각하였다. 1593 년 4월 18일에는 풍신수길의 명령으로 일본군이 서울에서 남쪽으로 총   퇴각 하였는데, 개전 당시의 167,250명의 병력이 53,000명으로 줄었다. 나대용은 거북선을 꾸준   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후기에 나온 거북선은 비용을 저렴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주로 노력하였   고, 심지어는 판옥선에 나무등판만 덮은 거북선도 만들어졌다. 남아도는 판옥선에 나무등판만 올릴 경우 20일 안으로 만들수가 있고, 비용도 매우 저렴했다. 이런 사실 때문에 거북선은 단순히   판옥선에 개판을 얹은 것에 불과하다는 오해를 하게 됐고, 심지어는 판옥선의 발명가인 정걸장군   이 판옥선을 조금 개량시켜 거북선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거북선은 판옥선과는 전혀다른 설계에 의해서 만들어진 군선이다.  판옥선보다 훨씬 견   고해서 아무리 많은 충돌을 해도 배가 손상받지 않았고, 전투원을 보호하기 위해 명중률과 위력   이 떨어지는 원거리 포격전을 해야 했던 판옥선과는 달리 거북선은 근접한 위치에서도 적을 공   격할 수 있어서 훨씬 위력적이었다.  화력에 있어서는 등 딱지에서도 승자총통을 발사할 수 있어   앞, 뒤, 좌우, 높은 망루등 어떤 위치에 있는 적이라 하더라도 거북선의 공격을 피할 수 없었다.   두 차례의 해전에 거듭 대패한 왜적들은 도무지 싸울 생각은 않고 우리의 동정만 살피고 있었다.   이때 복병장으로 최전선에서 적의 기습을 막는 중책을 맡은 나대용은 적이 침범해 들어오는 길   목인 견내량에 매복해 있던 적장 조승감의 부장 망고질지를 해변가 숲 속에서 사로 잡았고, 망고   질지를 잘 회유해서 왜군과 관련한 많은 정보도 얻을 수 있었다.   전라좌수영을 비롯한 조선관   군은 왜군의 투항과 귀순을 적극 유도했다. 그래서 투항한 항왜의 수가 무려 1만명에 이르렀다. 항왜는 조선군 내에서 조총제작, 화약생산, 검술 교관, 왜군전술 분석등의 일을 했고, 직접 전투에도 참가하여 적극적이고 용감하게 전투에 임해 전투력에도 많은 보탬이 되었다.  그들 중에는 공을 많이 세워 관직을 받은 자도 많았다.

 

9. 2차 진주성 싸움과 이순신의 백의종군

진주성은 그 동안 왜군들이 수 차례 맹공을 하였으나 , 끝끝내 함락시킬 수 없었던 터여서, 왜군들은 자신들의 실추된 명예를 위해서라도 기필코 진주성만은 함락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6월25일 제2차 진주성 공격이 시작되었다. 진주성 싸움은 6일간 밤낮으로 계속 되었는데, 이 싸움은 실로 치열한 싸움이었다. 충청병사 황진, 경상우병사 최경희, 진주목사 서예원, 나주 출신 의병장 김천일, 의병장 고종후 등과 우리 백성 6만여 명이목숨을 잃었다.  나대용은 합천군수로 있는 친척 조카 나척과 나척의 아우 나선이 진주성을 지키다 장렬하게 최후를 마쳤다는  소식도 들었다.  바다에 적들의 침입이 뜸해지자 1594~1596까지 거의 2년여동안  이순신의 휘하를 떠나 강진현감, 금구현감, 능주현감, 곡성현감 등을 거치며  목민관으로서 민생문제와 치안유지에 힘을 썼다.  이즈음 적들은 백방으로  생각해 보아도 충무공이 이끄는 우리 나라 수군에는 싸워서 이길 수는 없다고  여긴 나머지  이순신을 모함하는 계략을 꾸미었다. 이순신은 사형은  면했지만 그 대신 모든 관직에서  박탈되고 백의종군(벼슬이 없는 사람으로 군대를 따라 싸움터로 나아가는 것)의 명령이  내려졌다. 옥중에서 28일 동안 모진 고문을 당한 이순신은 걸음조차 제대로 걷지도 못할 정도였다.

10. 명량대첩
이러한 일로 인해  이순신의 뒤를이어 수군 통제사가 된  원균은 정유년 7월 7일 함대를 출동시켰다.  그러나 원균은 작전의 미숙과  판
단부족으로  가덕도에서 왜적을 만나 400여 명이 죽는 어이없는 실패를 당하고 말았다.  이어서 7월 15일 칠천량까지 물러난 우리 수군에 왜적 함대가 기습을 하자, 원균은 배를 버리고 거제도로 숨어 들어 갔으나, 뒤쫓아온 왜적에게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이 싸움에서 우리 수군이 얼마나 참패를 당했는지 200여 척이나 되는 대함대에서 겨우 12척이 남았다.   원균이 패하고 수군이 전멸
었다는 보고는 조정을 발칵 뒤집히게 했다. 조정에서는 다시 이순신을  3도수군통제사로 임명했다. 나대용은 경상우수사 배설로부터 인수받은 12척의 판옥선을 신속히 수리하고,   제작중이던 1척을 마저 완성시켜 총13척의 판옥선을 준비했다.  9월 14일 왜군의 주력 함대가 울돌목에 나타났다.  왜선 330여 척에  우리 배 13척은 실로 절망적인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이순신은 병사들에게 용기를  내라고 격려했다.

   “살고자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한다면 살 수 있다”
  “한 사람이 길목을 막으면 천명의 사람에게도 두려움을 줄수있다.”

9 월 16일 결전은 이른 아침부터 시작되었다. 이 작전으로 순식간에 왜선 31척이 우리측의 공격에 침몰하고, 그 외에도 많은 적선들이 크게 부숴졌다.   세계 해전사에 이런 통쾌한 사례는 전무후무하다.

11. 노량 해전
왜적들이 더 이상 전쟁을 할 기력을 잃고 있는 즈음에  왜국에서 극비 명령이 전달되었다.  8 월 18일 풍신수길이 죽었다는 소식이었다. 
  마침내 우리 수군은 명나라 수군 5천여 군사와 합세하여 최후의 결전장인 노량으로  배를 몰았다.  싸움은 깊은 잠에 빠진 이른 새벽에 왜적을  기습하는데서 부터 시작되었다. 수 없이 많은 왜병이 물 속으로 사라져 갔고  우리측의 승리가 확실시 되는 듯 했다. 그러나 동이트자, 적들은  의외로 우리의 수군이 적은데  용기를 얻었는지  남은 배를 수습하여 오히려 우리 수군을 포위하는 것이다.  이 싸움은 그날 아침 늦게까지 계속되었는데, 우리 수군은 용감한 공격으로 많은 적을 격침시키고  피맺힌 원한을 풀 수 있었다.  11 월 19일 노량해전이라 불리우는 관음포에서의   싸움은 결전 속에서 날이 밝았는데 주위가 밝아지자 가까운 거리에서 사격하는 사수에게는 목표물이 뚜렷하게 보였다.  왜적들은 독안에 든 쥐가 되어 결사적으로 이순신의 판옥선을  향해 집중사격을 가했다.  그 판옥선에는 송희립과 이순신장군, 장군의  맏아들 회 그리고 조카 완이 함께 타고 있었다.  이들 모두 적탄을 맞고 쓰러졌다. 이 전투에서 나대용의 사촌동생 나치용도 적의 탄환에 맞아 죽고 말았으니, 이순신 장군과 나치용 그리고 많은 병사들의 죽음 앞에서 나대용은 통곡을 했다.

13. 전쟁은 끝나고
그 처럼이나 참혹했던 7년 전쟁은 육지에서의 끈질긴 의병들의 구국항쟁과 목숨을 바쳐 남해바다를 지킨 우리의 수군들 때문에 일본의 
침략야욕을 물리칠 수 있었다.  나대용 장군 그는 이 전쟁에서 셀 수 없이 많은 공을 세웠다.  거의 모든 해전에 참가해 수 많은왜선을 대파한 훌륭한 군관이었지만 특히 선조 임금께서는 거북선 건조의 공을 귀하게 여겼다.


선조 임금께서 나대용 장군을 치하한 글귀가 오늘날까지 남아 있으니 임금께서 거북선과 나대용을 얼마나 가상히 여기셨는지 그 내용을 살펴본다. "너는 진작부터 기술을 지녔고, 마침내 훈련원에서 벼슬도 하였도다. 그 때 공사만을 받들고 사리를 잊으니, 세상에서는 너를 잘못 알고 우직하다고만 하였도다. 그러나 어려운 일을 당해도 결코 회피하는 일이 없으니, 사람들이 어찌 그 정성을 알아주지 아니할꼬. 돌아보건데, 남해는 요충지대라 자주 왜적의 침략을 받았도다. 조정 중신 모두가 바다에서 무슨 싸움이 있겠느냐며, 대단찮게 여길 때 너는 해상에서 왜적을 무찔러야지, 어찌 육지에서 까지 날뛰도록 내버려 두겠느냐며, 드디어 배 만드는 역사를 일으켰도다.  궁핍한 나라 살림에 재력의 핍박이 얼마나 심했는고?  이에 그 장한 일을 네 손발로 노력해서 이루었도다. 겨우 열 달만에 일을 끝내어 세 척을 만들었다니  이미 너의 직책을 다하였으므로 어찌 그대를 보상하는 특전이 없을소냐!" 이 처럼 선조 임금은 나대용 장군을 치하하고 교지를 내려 중책을 맡겼다.

나대용 장군은 백성들의 어려움을 살피는 어진 목민관으로 최선을 다하면서 동시에  남해일대의 방비를 엄하게 하는 일을 했다.  마침내 남해안   일대가 평온을 되찾고 여기저기로 뿔뿔이 흩어졌던 많은 백성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람 사는 마을의 모습이 갖춰지고 차츰 전쟁의 상처도 아물어갔다. 또 다시 선조 임금께서는  나대용 장군의 공을 치하하여 높은 벼슬아치가 입는 붉은 철릭과 삼지창 청룡도를 하사하시고  교지를 내렸다. "공로가 있으면 상 주지 않는 법이 없나니 기왕 지닌 재능과 덕을 다하여 더욱 힘쓸지어다." 그 뒤 장군은 더욱 성실한 근무와 훌륭한 업적을 쌓아갔다.

 

1601 년 신축년 11월에는 나대용 장군의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1604년에는 연달아 아버지까지 돌아가셔서 공직을 물러났다. 그 뒤 3년 상을 마친 후에 1606년 삼도수군통제사 한효순의 군관이 되어 전선 25척과 창선이라는 성능이 아주 뛰어난 배를 만드는 공을 세웠고, 전후 해군 재조정비 강화책과 창선 건조를 주장하는 상소문을 올리었다.  1610 년 나대용의 나이 55세 남해현령(통정대부)을 지냈고, 해추선(쾌속선)을 고안하여 제작하였다.   1611 년에는 교동수사를 제수받았고, 얼마되지 않아 종2품 가선대부인 경기수군  통어사(경기수사)로 승진되었지만, 전쟁 때의 탄환 상처가 다시 도져 부임도   하기 전에 그의 나이 57세를 일기로 나라와 민족을 위해 끝없이 몸부림치며 애를 썼던 파란만장했던 생애를 마쳤다.

 

나대용장군은 실로 이순신 장군의 충성스런 부하요,  거북선 제작의 최고 공로자이며, 구국분전한 용장이요, 걸출한 과학기술자였다. 또한 백성을 사랑하고 사리를 챙기지 않는 어진 목민관이었다훗날 대한민국 해군에서는  나대용 장군의 공을 높이 기려 우리나라 8번째 잠수함의 이름을 ‘

나대용함‘ 이라고  명명했다

출처 : 금성나씨종친회
글쓴이 : 금장 나승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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